<이처럼 사소한 것들>의 제목은 상당히 역설적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사소하다고 느끼는 것들이 사실은 전혀 사소하지 않다는 말을 하려는 것 같다.
사소하면서 사소하지 않은 것,
그것은 무엇일까.

. 사소하지만 사소하지 않은 것들... 우리의 모든 일상. 범위가 너무나 넓은데? 모든 일상이 사소한 듯 실체를 숨기고 있지만 사실은 그것들이 모여 나를 이룬다는 것. 나라는 사람은 그 모든 사소한 것들로부터 만들어진 존재라는 사실.. 머 이런 걸까?
이런 제목, 마음에 든다.
머 이런 생각 따위를 하며, 읽기 시작하였다.
책의 시작이 묘하다. 난데없이 작가는 자기 작품의 정체를 드러내 버린다.
'아일랜드의 모자보호소와 막달레나 세탁소에서 고통받았던 여자들과 아이들에게 이 이야기를 바칩니다.'
그리고 불길한 사건의 기운을 느끼고 있을 독자에게 '알량한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1916)' 일부를 읽힌다.
"아일랜드 공화국은 모든 아일랜드 남성과 여성으로부터 충성을 받을 권리가 있고 이에 이를 요구한다. 공화국은 모든 국민에게 종교적, 시민적 자유, 평등한 권리와 평등한 기회를 보장하며, 국가 전체와 모든 부문의 행복과 번영을 추구하고 모든 아동을 똑같이 소중히 여기겠다는 결의를 천명한다."
[아일랜드 공화국 선언문](1916)-
대개의 헌법이 그렇듯 충성, 권리, 자유, 평등, 기회, 행복, 번영과 같은 애매모호한 좋은 말들이 나열되어 있다. 불길한 사건이 일어났을 막달레나 수녀원의 세탁소는 공화국 선언문이 공포된 1916년 이후로도 60여년간 운영되었다고 한다.

작가가 이 책의 내용을 암시하기 위해 공들여 썼다고 하는 도입부이다. 나는 아일랜드와 이 불길한 사건이 일어났을 뉴로스 타운이라는 곳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위해 신경쓰며 읽었다. <이니섀린의 밴시>에 나온 아일랜드의 풍경을 떠올리기 위해 애쓰며,,, 그런데 시계를 앞으로 돌려야 11월 아닌가???... 10월에서 뒤로 돌렸는데 왜 11월이지??? 앞뒤가 그렇게 되는 거였나??
책의 도입부는 이렇게 시작한다.
10월에 나무가 누레졌다. 그때 시계를 한 시간 뒤로 돌렸고 11월의 바람이 길게 불어와 잎을 뜯어내 나무를 벌거벗겼다. 뉴로스 타운 굴뚝에서 흘러나온 연기는 가라앉아 북슬한 끈처럼 길게 흘러가다가 부두를 따라 흩어졌고, 곧 흑맥주처럼 검은 배로강이 빗물에 몸이 불었다.
책11쪽
소설의 도입부부터 분위기는 아일랜드 특유의 스산함과 회색빛 하늘, 서늘하다못해 싸늘한 공기, 바싹 말라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낙엽, 흑맥주같이 짙은 색에 꿈틀거리듯 흐르는 강물 등의 이미지로 시작한다. 아일랜드를 가본 적은 없지만, 나에게 아일랜드는 이런 이미지의 나라이다.
주인공 '빌 펄롱'은 40대 초반 정도로 추측되는 사내다. 가정적이고 성실하고 이웃들과도 척지지 않는 모나지 않은 성격의 남자. 딸을 다섯이나 부양하고 있지만 특별할 것 없는 아일랜드 시골에서 석탄 등을 팔면서 빚지지 않고 성실하게 살고 있다. 나쁘지 않은 삶이다. 작품 속에서 빌 펄롱은 불길한 기운을 가진 과거를 회상하다 문득 이런 생각을 한다.
곧 펄롱은 정신을 다잡고는 한번 지나간 것은 돌아오지 않는다고 생각을 정리했다. ....(중략).... 게다가 여기에서 이렇게 지나간 날들을 떠올릴 수 있다는게 ....(중략)... 다행이라고 여겼다.
책39쪽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다 문득 오늘의 평온함에 감사함을 느끼는 소시민적 삶이다. 이 정도 사는 것만 해도 어디인가. 누구에게 불평을 하겠는가.
다만 그의 출생은 조금 미심쩍다. 남편의 유족연금으로 나름대로 넉넉한 생활을 하는 윌슨씨 댁의 가사도우미였던 어머니로부터 태어났는데, 아빠가 누군지 모른다. 천만다행인 것은 어머니를 고용한 윌슨부인이 인정이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아빠없는 아이를 낳은 가사도우미를 내치지 않고 돌봐주고 그녀가 낳은 아이까지 거두어 기른다. 어찌보면 대단할 것 없는 일이지만 또 조금만 들여다보면 대단한 일. 그렇게 자란 빌 펄롱은 딸 다섯을 거느린 가정을 이루고 살게 된 것이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기대하며 고사리같은 손으로 산타할아바지에게 카드를 쓰는 딸들의 순진무구함은 윌슨 부인의 인정이 뿌린 씨앗이다.
딸들의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며 선물을 고민하고, 내일은 바쁠 것을 걱정하는, 빌 펄롱은 자신의 이런 사소한 행복들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아는 사람이다. 길을 가다 만나는 어려운 사정의 아이들에게 주머니를 털어 동전을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집에 돌아가면 아내의 마뜩찮은 반응을 알면서도 그는 자기가 가진 것을 나누어 준다. 그는 어려운 이들을 외면하지 못한다.
이런 빌 펄롱이 그 마을의 정신적 지주역할을 하는 수녀원의 비밀을 마주하게 된다. 아일랜드는 영국과 대치하며 카톨릭 세력이 강해졌다고 하는데, 카톨릭을 기반으로하는 헌법까지 제정되었다. 카톨릭이 각 지역에 수녀원과 같은 시설을 두고 이를 기반으로 실질적으로 지역민들을 통제하고 관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어떤 통로로든 수녀원과 연관되어있고 수녀원의 눈밖에 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빌 펄롱은 석탄을 배달하는 과정에서 수녀원의 석탄창고에 갇혀 사는 여자아이를 발견하게된다. 처음에는 그도 여자아이에 대해 외면하려고 한다. 하지만 곧 그는 그것을 외면할 수 없음을 깨닫는다. 바로 그가 누군가로부터 아주 사소한 것들을 빚졌기 때문이다. 아주 사소한 기억, 사소하지만 따뜻한 눈빛, 사소하면서도 부드러운 손길, 사소하면서도 너그러운 태도, 사소하지만 배려깊은 이해와 같은 것들이 그를 훌륭한 사내로 만들었다는 것을 그가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녀원으로 돌아가 그 아이를 구출해오면서 그는 이 사소한 행동이 앞으로 어떤 파장을 일으킬 지 완전히는 몰랐을 것이다. 그를 도왔던 사람들이 그에게 배풀었던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 몰랐던 것처럼. 다만 그들은 그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좋은 일을 했을 것이다. 그 사소함들이 모여 희망이 된다.
글로 정리하다보니 사회고발 또는 사회비판적인 작품의 역할도 다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어 <도가니>의 경우 당시에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사건을 고발함으로써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자하는 르포형식의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은 '막달레나 수녀원'의 문제가 해결된 이후 쓰여졌다. 그러니까 해결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작가가 이 작품을 쓴 이유는 작가 스스로, 또 독자들에게 질문을 던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보았다.
당신은 믿습니까? 당신이 하는 사소하지만 옳은 일들의 가능성을? 작은 나비의 날갯짓이 가져올 희망을?
당신은 진정 믿습니까?
나는 나의 사소한, 그리고 옳은 행동들의 가능성을 믿고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작가가 빌 펄롱을 통해 던지는 질문에는 선뜻 대답하기 어려웠다. 자신있게 대답했다가 혹여 미래의 어느날 비겁한 나를 마주하는게 두려웠다. 대답하지 않으면 최소한 나는 나를 속인 것은 아니게 되니까.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사소하지만 옳은 일, 사소하지만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대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답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대답을 한다면 무엇이 달라질까? 내일 당장 도덕군자가 되어야만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에겐 그럴 능력이 없다.
다만 사소한, 아주 사소한 옳은 일 하나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빌 펄롱이 지저분한 발을 한 아이를 업고 갈 때, 그 발을 혐오스런 눈빛과 질린 얼굴로 보지 않는 정도의 사소함이라면... 그 지저분한 발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면서도 모른척하는 정도라면... 나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아니다, 그것은 하는 것이 아니다. 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아주 사소한 것들'을 하지 않는 것도 내가 그들의 작은 날갯짓에 대답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망망대해와 같은 내 삶에 나침반의 역할을 해주는 작품을 만나게 되어 매우 반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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